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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 - 김용범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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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2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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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기존 경기순환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자꾸 어긋난다. 수출이 좋다, 반도체가 호황이다, 코스피가 오른다 —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혹시 지금의 변화는 단순한 업황 회복이 아니라 ‘산업구조’와 ‘국가구조’가 동시에 재편되는 과정은 아닐까?

이 글은 이 파격적인 가설에서 출발한다. AI는 단순한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 인프라다. 그리고 그 인프라 전환의 중심에 한국이 있다. 만약 이 초기 가설이 맞다면, 한국은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순환형 수출경제로 움직이지 않는다. 구조적 희소성과 지속적 초과이윤을 기반으로 한 ‘기술독점경제에 가까운 구조’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성장률이나 주가 수준을 넘어, 국가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이미 현실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동시에 나타나는 흐름들 — 반도체 산업의 위상 변화, AI 인프라 경쟁,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문제가 국가 전략 의제로 올라오는 현상, 그리고 한국 자산시장 재평가 움직임 — 을 함께 놓고 보면 기존 경기순환 언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변화의 조짐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른 시기에 이 가능성을 논의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 이번은 다르다 — AI 수요 구조의 비가역성

“이번은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 — 역사상 가장 많이 틀린 말 중 하나다. 닷컴 버블도, 일본 부동산도, 중국 성장론도, 미국 서브프라임도 모두 이 말과 함께 왔다가 무너졌다. 그 냉소는 필시 이 글에도 향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역사 속 “이번은 다르다”의 실패는 거의 다 자산 ‘가격’ 이야기였다. 집값, 주가, 멀티플, 버블 — 가격이 구조를 앞질러 달려가다 무너진 것이다. 이 글은 가격을 말하지 않는다. 공급망 구조, 물리 인프라, 지정학, 메모리의 전략 자산화 — 체제 전환 가설이다.
한편 진짜 체제 전환은 대개 새로운 산업이 불쑥 등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산업의 전략적 위치가 바뀌는 방식으로 온다. 석유도 원래 검은 액체였고, 메모리도 원래 범용 부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AI 반도체 수요를 기존 메모리 사이클의 연장선에서 해석한다. 202122년 호황, 202324년 조정, 그리고 다시 찾아온 호황 — 과거 패턴에 익숙한 시각에서는 지금 역시 언젠가 꺾일 순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수요는 구조가 다르다. 초기 AI 투자는 학습 중심의 데이터센터 확장에서 출발했지만, 수요는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추론 인프라, AI 에이전트, 소버린 AI,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피지컬 AI와 로보틱스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레이어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중요한 점은 각 레이어가 이전보다 더 높은 메모리 집약도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레이어가 추가될수록 수요는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으로 누적된다.
AI 인프라는 일회성 설비 투자가 아니다. 한번 구축된 인프라는 지속적인 업그레이드 수요를 만든다. 성능·전력효율·집적도가 동시에 개선되는 HBM 같은 제품은 세대 교체가 필수적이다. 스마트폰 교체주기처럼 수요가 포화되는 구조가 아니라, 인프라 자체가 계속 새로운 수요를 생성하는 구조다. 이것이 이번 국면이 과거 메모리 사이클과 다른 결정적인 이유다.

• AI는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라 산업 인프라다

AI를 기존 인터넷 산업의 연장으로 보면 많은 숫자가 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AI를 전기·철도·통신망 같은 산업 인프라 전환으로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AI는 단순히 앱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데이터센터, 전력망, 냉각, 변압기, 로봇, 산업 자동화, 도시 인프라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물리 시스템이다. AI가 클라우드 안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세계로 내려올수록 필요한 것은 소프트웨어만이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 전력 장비, 배터리, 정밀기계, 센서, 디스플레이, 로보틱스 제조 역량 같은 물리적 공급망 전체가 중요해진다. 이 전환은 글로벌화 시대의 가벼운 경제에서, 다시 산업 역량이 핵심이 되는 세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 왜 한국인가 — 풀스택 제조 역량의 희소성

AI 시대의 핵심 질문은 단순하다. 누가 AI 모델을 만드는가가 아니라, 누가 AI 인프라를 실제로 공급할 수 있는가?
이 관점에서 보자면 한국은 매우 특수한 위치에 있다. 미국은 설계와 플랫폼에서는 압도적이지만 제조 기반이 제한적이다. 중국은 대규모 제조 역량을 보유했지만 지정학적 신뢰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일본은 소재와 장비에 강점을 갖고 있고, 독일은 기계와 화학에 강하다. 대만은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정밀 제조, 전력 장비, 산업 자동화까지 이어지는 공급망을 통합적으로 보유한 드문 나라다. 어느 것 하나 빠진 게 없는 팔방미인에 가깝다.
이것은 단순한 산업 경쟁력이 아니다. 공급망 주권이 국가 전략의 핵심 변수가 되는 시대에, 이런 제조 역량은 지정학적 레버리지에 가깝다. AI 인프라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수록, 한국 산업 생태계의 전략적 중요성도 덩달아 커진다.
다만 이런 변화는 북해유전처럼 누구나 즉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산업 구조 안에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는 변화는 대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때 이미 흐름이 시작되고 있었구나” 하고 뒤늦게 인식된다. 인간은 선형적 변화에는 익숙하지만 체제 전환에는 둔감하다.
더구나 메모리 반도체와 제조업은 원래부터 한국이 해오던 산업이다. 같은 산업처럼 보이는데 왜 이번에는 특별한가를 설명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 단계에서는 이 논지가 과장된 낙관론처럼 들릴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반응이다.

• 순환형 수출경제가 기술독점적 경제구조로 전환 가능한가

한국 경제는 오랫동안 전형적인 순환형 수출경제로 움직여 왔다. 수출이 좋아지면 성장률이 올라가고, 글로벌 경기 둔화가 오면 빠르게 꺾였다. 과거 한국 제조업은 항상 경쟁 심화, 중국 추격, 마진 압박, 대규모 설비투자 부담 속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AI 인프라 산업은 성격이 다르다. 높은 기술 장벽, 극소수 기업 중심 구조, 국가안보 공급망, 지속적 업그레이드 수요라는 특징을 동시에 가진다. 메모리가 단순 범용재가 아니라 전략 인프라 레이어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AI 시대의 메모리·인프라 수요가 장기 구조 변화라면, 한국은 처음으로 지속적 초과이윤을 생산하는 국가에 가까워질 수 있다. 순환형 수출경제에서 기술독점적 성격이 강한 경제구조로의 이동 — 이것이 지금 한국 앞에 열려 있는 가능성의 핵심 본질이다.

• 거시경제 변수의 재설정

이 변화가 현실화되면 기존 거시 변수들의 균형점도 달라진다.
기존 통계 체계는 AI 메모리 산업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성능·집적도·전력효율이 동시에 개선되는 산업에서는 가격 변화와 품질 개선을 분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 결과 기업 이익은 폭증하는데 실질 GDP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보이는 괴리가 반복될 수 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명목 GDP, 무역수지, 기업 영업이익, 그리고 국민의 구매력(교역조건) 변화다.
무역흑자가 구조적으로 확대되면 원화는 장기적으로 강세 압력을 받는다. 원화 강세는 수입물가를 낮추고, 이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일부 상쇄한다. 높은 명목 성장,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물가, 강한 통화, 자산가격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새로운 거시 국면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한국형 골디락스 국면이다.
이 경우 한국의 1인당 GNI는 중장기적으로 OECD 상위권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의 변화가 아니다. 국가의 위상, 자산가격 체계, 국민의 소비 구조, 글로벌 인재 흐름까지 모두 바꾸는 변화다.

• 그러나 K자형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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