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에 들어섰다. 성인이 된 지 정확히 십 년이 되는 시점이다.
지난 2025년은 내게 있어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트레이딩과 투자라는 길 위에서 단계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그 덕분에 잠시 멈춰 서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할 여유도 생겼다.
이 십 년, 삼천 일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규칙적인 수면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다.
한편으로는 일 때문이었다. 밤낮이 자주 뒤바뀌었고, 한두 시간마다 잠에서 깨 차트를 확인하고 정보를 훑어보며 언제든 컴퓨터 앞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곤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몸은 이미 지쳐 있는데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영화 「아비정전」 속 ‘발 없는 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잠드는 새 말이다.
뒤척이다 보면 지난 십 년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수능 성적을 확인하던 날, 스스로 꽤 잘 봤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때 처음으로 얼음 구덩이에 떨어진 듯한 절망을 느꼈다. 대부분의 중국 아이들에게 그 세 자리 숫자는 지난 십팔 년의 모든 노력이고, 동시에 인생의 갈림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인생이 비록 광야는 아닐지라도, 결코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고민 끝에, 개강 후 석 달쯤 지나 재수를 포기했다.
적어도 985, 적어도 컴퓨터 전공. 목표를 바꿔 청북·복단·교통대 같은 최상위 대학원 진학을 노리기로 했다.
대학 일학년 때 나는 고등학교 삼 학년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고, 유일한 여가라면 금요일 오후 농구, 토요일 PC방 게임 정도였다.
그때 깨달았다. 고삼 때 문제를 많이 풀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건, 전술적인 근면으로 전략적인 게으름을 가리고 있었던 거라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나는 전공 성적 삼 위를 기록했다.
젊음은 쉽게 자만을 부른다.
“고득점이란 게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었고, 점점 느슨해졌다. 수업을 자주 빼먹고, 많은 기말고사를 전날 밤샘 벼락치기로 버텼다.
다행히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여전히 수능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다는 마음은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AI가 미래라 했고, 나는 머신러닝을 독학해 Kaggle 대회에 참가했다.
누군가는 인턴과 연구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고, 나는 LeetCode를 풀며 이력서를 닥치는 대로 넣었다.
삼 학년이 되어 대기업 인턴 오퍼를 받고 베이징으로 갔다.
그 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돌이켜보면 운명이 꺾이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동료들은 모두 친절했지만 나이 차이가 있었고, 공통 화제도 많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함께 인턴을 하던 친구들조차 각자 바빠 가끔만 만날 수 있었다. 서이치치의 매서운 바람과 함께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전해에 아주 가까웠던 외할머니를 잃었고, 미래에 대한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취업을 할지, 유학을 갈지, 대학원을 갈지 알 수 없었다.
지나간 것은 되돌릴 수 없고, 앞날은 어떻게 가야 할지 몰랐다. 심한 불면증이 찾아와 새벽 네다섯 시가 되어야 잠들 수 있었다.
다행히 인턴 업무 자체는 크게 힘들지 않았고, 남는 시간에는 교양서를 읽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강아지 똥이 돈을 굴리는 법」 같은 재테크 입문서들이었다. 그리고 펀드를 사기 시작했다. 이 작은 선택이, 내 트레이딩 인생에서 나비가 처음 날갯짓을 한 순간이었다.
단순한 CRUD 개발자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전환 기회를 포기하고 대학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구월, 보류 중이던 추천 입학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학을 선택한 동기가 있었고, 나는 그 자리를 이어받아 연구실에 들어가 멀티모달 AI를 공부하게 됐다.
한숨 돌릴 수는 있었지만, 논문을 읽을수록 깨달았다. AI의 본질은 수학이고, 내 수리 능력은 최상위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리즘 엔지니어를 평생 직업으로 삼았을 때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논문을 읽고 코드를 짜는 한편,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계속 고민했다. 투자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다. 펀드에서 주식, 그리고 크립토까지.
대학 이학년 때, 나는 게임 아이템을 팔아 하루에 팔천 위안을 벌어본 적이 있다. 러시아 서버 이벤트였는데, 이메일 하나와 러시아 사이트 절차만 이해하면 무료로 아이템을 받을 수 있었고, 이를 개당 사백 위안에 되팔 수 있었다. 지속 가능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정보의 비대칭과 실행력만 있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 계기였다.
그 후 나는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코인 시장에 쏟았다. 당시 일반인이 정보 격차를 만들기 가장 쉬운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석사 이 학년 때, 상하이의 대기업에서 알고리즘 인턴으로 일했다. 아침 열 시 출근, 저녁 여덟 시 귀가 후 새벽 두세 시까지 프로젝트와 트레이딩을 병행했다. NFT 거래로 인생 첫 백만 위안을 벌었다.
그리고 동시에, 팀의 동료들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며 나는 알고리즘 분야에서의 경쟁력이 크지 않다는 사실도 분명히 깨달았다.
결국 졸업 후 개발자의 길을 포기하고, 전업 트레이더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이미 여러 번 썼으니 생략한다.
십 년 전, 막 대학에 들어가 인생의 방향을 몰라 헤매던 소년은, 트럼프라는 인물을 처음 접하며 그를 희화화하는 밈을 보던 시절에, 십 년 뒤 이 인물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집권해 직접 밈코인을 발행하고, 자신이 그 거래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 최대 개인 보유자 중 한 명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딥러닝에서 전역 최적해란 전체에서 가장 좋은 해를 의미하고, 국소 최적해는 일부 구간에서만 최선인 해를 말한다. 모든 구간에서 국소 최적을 선택해도, 반드시 전역 최적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시야의 한계 때문이다.
돌아보면 수능, 인턴, 대학원이라는 모든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국소 최적을 고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릴 적 꿈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꽤 괜찮은 전역 해에 도달했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우리는 사전에 점들을 잇지 못한다. 오직 뒤돌아봤을 때만 그 궤적이 의미를 갖는다.
그 꿈이란, 가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직접 창업해 제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를 이루고 싶었지만, 지금의 나는 투자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기업에 참여하고 싶다.
다시 십 년이 흘러 돌아봤을 때, 한때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앞길에 아는 이 없을까 걱정 말라. 천하에 너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