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가?
나는 그 닉스의 네 번째 경기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퀀트 금융 트레이더 무리와 함께 한 바에 앉아 있었고,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경기 시간이 10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스퍼스는 29점 차로 앞서고 있었다.
우리 몇 명은 농담처럼 폴리마켓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예측시장은 닉스가 질 확률을 99.6퍼센트로 보고 있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집에 가는 편이 기대값이 더 높겠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워치 파티를 떠났다.
그런데 기적처럼 흐름이 바뀌었다. 닉스는 전기처럼 맹렬한 기세에 사로잡힌 듯 따라붙었고, 결국 한 점 차로 경기를 뒤집어 이겼다. 버저가 울리는 순간, 바 전체가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황홀경에 빠져 뛰어오르며, 술에 취한 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원초적 열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내가 살면서 몇 번밖에 경험해보지 못한, 야만적이고도 종교적인 열광이었다.
환희에 찬 거리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 집으로 걸어가면서, 내 생각은 다시 그 예측시장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걸까? 사람들이 스포츠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기가 완전히 예측 가능하다면, 우리는 모두 내 친구처럼 4쿼터를 건너뛰고 집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100분의 1짜리 희망,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 때문에 끝까지 남아 지켜본다.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는 『세계의 통제 불가능성』에서 스포츠 관람을 첫눈이 올 때의 들뜬 감정과 연결한다. 아무리 우리의 일기예보가 발전해도, 첫 눈송이가 혀끝에 내려앉게 두는 일에는 여전히 즐거운 마법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침입”이며,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경이감을 다시 깨운다.
근대성의 거스를 수 없는 프로젝트는 세계를 더 읽기 쉽고, 관리 가능하며, 수익화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범주화가 한 단계 진전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지루한 존재가 된다. 스키 리조트는 첫눈이 내리기도 전에 인공눈을 만들고, 폴리마켓은 농구 경기를 언제 떠나야 하는지 알려준다.
우연이 사라지면, 우리는 스스로를 수학적 무관심 속으로 마비시킨다. 그러다 충분히 통제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나야만, 우리는 무기력한 자동 루틴에서 깨어난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적게 알고 있었는지를 깨닫고, 새로워진 경이로움으로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이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완벽한 문장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순간을 사랑한다. 친구가 무작정 영화 한 편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태를 사랑한다. 그렇게 시를 쓰고, 컬트 클래식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ChatGPT는 언제나 다음 토큰을 “알고” 있고, TikTok은 내가 보고 싶어 할 다음 영상을 언제나 “알고” 있다. 예측은 현실이 되고, 나는 눈송이를 알아차리는 법을 잊어버린다.
내가 어리석음을 느끼고 싶을 때, “군중의 지혜”가 무슨 소용인가? 내가 예측 불가능하게 글을 쓰고 싶을 때, 예측 텍스트가 무슨 소용인가?
퀀트 트레이더들은 “사전 확률을 업데이트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새로운 정보를 더해 세계에 대한 더 정확한 예측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점은, 그들의 사전 확률이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새로운 데이터를 모아야 하고, 더 많은 매개변수를 바꿔야 하며, 세계가 진화함에 따라 모델을 천천히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사전 확률을 낮추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가장 좋은 순간들 중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지식에서 나온다. 무엇을 알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알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출처: https://etymology.substack.com/p/downgrade-your-priors
